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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금상] 이현희 - 나의, 가장 행복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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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2-08-23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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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장 행복한 시간
이 현 희 (금상 수상 作)
책갈피가 꽂혀있는 책을 다시 펼친다. 어제까지 읽었던 부분이 되살아나고 이제 그 다음을 읽을 차례다. 두꺼운 한 권을 하루나 이틀 정도 단숨에 읽을 책도 있지만 그런 책일수록 일부러 나는 조금씩 읽는다. 아껴둔 과자를 조금씩 꺼내 먹듯 읽는 것이 좋아서이다. 즐겨 시청하는 드라마의 한 회가 갈등이든 위기든 무척이나 아슬아슬하게 끝나 다음 회가 무척이나 궁금해지고 기다려지는 그런 심리 같은 것일 수도 있고 나의 독서 습관일 수도 있지만 좋은 책일수록 그렇듯 날마다 조금씩 음미하며 읽어야 한다는, 이를테면 양서(良書)를 판별하는 나의 기준 같은 것이기도 하다.
책을 읽는다. 낱낱의 활자들을 읽는 것은 비록 눈이지만 그들이 어울려 하나의 상(像)으로 마음에 또렷하게 맺힌다. 그런 심상(心像)들이 큰 의미나 울림으로 나의 가난한 마음을 더 알차고 풍요롭게 가꾸는 것이라 여기는 것이 내 아는 독서의 가치나 효용인 셈이다. 그리하여 우습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가 책을 읽는 시간은 짧든 길든 심심함을 달래거나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지적 욕구는 물론이고 나 자신과 타인들의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공감함으로써 결국에는 나 자신과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려는 경건한 한 때인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그 자신을 그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듯 여기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의외로 자신이 자신에 대해 무지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독서를 통해 깨닫는다. 그리하여 독서는 고요히 책을 읽어가며 내 내면에서 이는 소리들에 귀 기울임으로써 타인이 아닌 내가 나와 소통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은 없어진 모 출판사에서 주부를 대상으로 공모한 독후감 공모에 응모하여 비교적 큰 상을 받았던 것을-. 읽는 것은 좋지만 쓰는 것에는 소질이 없어 응모하겠다는 의도가 전혀 없었음에도 한 여자의 삶을 기록한 책의 내용이 그때껏 걸어왔고 앞으로 걸어갈 내 삶의 방향과 어찌 그리도 비슷하게 느껴지던 것인지 그리하여 오직 공감(共感)한다는 그 느낌 하나로 솔직하게 쓴 것이 뜻밖에 감사해야 마땅한 결과를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독서가 공감만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느낌을 받는 것이라도 그것은 그것대로 내가 겪지 못한 또 하나의 삶으로 혹은, 간접 경험으로서의 가치를 가지는 것이니 독서를 통해 얻는 것은 세상의 다양한 삶들과 지식들, 그리고 가치들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가끔 파란만장한 누군가의 일생을 다룬 책을 읽고 나면 마치 내가 그런 삶을 산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한참동안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하던 것이다.
나의 가장 행복한 시간은 마음을 가지런히 하여 책을 읽는 시간이지만 그 못지않게 행복한 시간은 책을 고르는 시간이다. 동네 서점이나 도심의 큰 책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미 포만감이 들고 그곳에 들어 서가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수많은 책들을 이것저것 펼쳐보며 고르는 그 시간이 조금도 지루하거나 아깝지 않고 즐겁기만 하던 것이다. 누군가가 들으면 공연한 지적 허영심이라고 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많은 책들과 그 안에 담긴 내용들이 그 때만큼은 다 내 것인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서이다. 독서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남편도 그렇고 나도 그렇지만 좋은 책은 빌려보는 것이 아니라 구입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책을 자주 사는 편인데 남편은 주로 인터넷 서점을 이용하는 반면에 나는 직접 서점에 가서 서가에 꽂혀있는 책들을 꺼내 펼쳐 눈으로 보며 고르는 것이 좋다. 언젠가 남편이 농(弄) 삼아 서점에 직접 가는 것이나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것이나 그 책이 그 책 아니냐며 말해 내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서점에 가면 그 많은 책들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기도 하고 책들에서 풍겨나는 제각각의 향기 같은 것이 있다고 답했는데 남편이 그를 믿든, 믿지 않든 그것이 내가 직접 서점에 가는 이유이다. 필요한 것들을 집에서 받을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기는 하지만 같은 빵이라도 주문해서 배달된 빵보다 이른 아침 빵가게에 직접 가서 갓 구워낸 빵에서 풍겨나는 특유의 짙은 효모 냄새를 코로 맡고 모락모락 피어나는 수증기를 눈으로 보면 빵이 더 먹음직스럽게 느껴지는 물론이고 까닭 없이 하루가 더 행복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는 프랑스의 한 여류 작가의 말과도 통하는 답이기도 한 것이다. 조금 더 과장해서 말하면 내게 서점은 종교적인 의미는 아니지만 하나의 성지(聖地) 같은 곳이라 그곳에 가는 것은 일종의 순례(巡禮)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독서가 책을 통해 내 그때껏 모르던 것들을 앎으로써 깨달음을 얻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또한, 책을 교주(敎主)로 하는 하나의 종교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곳에서 고르는 책들에 나만의 특별한 취향이나 관심분야가 있는 것이 아니라서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 편이지만 굳이 그를 묻는다면 내가 경험하지 못한 삶을 다룬 수필이나 소설을 즐겨 선택하는 편인데 그것이 비록 타인의 삶이기는 하지만 이해와 공감을 통해 나의 삶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니 어떻게 걷던 오직 한 길일뿐인 내 삶의 영역이 그만큼 넓어지는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책속에 길이 있다.’는 말의 의미는 넓고도 깊어 한 줄기 외길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길들이 그 안에 있어 사람들은 책을 읽고 깨달으며 저마다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삼여 년 전부터 저녁식사 후 남편과 함께 아파트 인근을 산책하고 돌아와 짧게나마 티타임을 갖고 있다. 그 이전에도 이따금 그런 적은 있었지만 주로 두 딸의 신상 문제와 빠듯한 살림, 그리고 한낱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는 TV 드라마의 전개와 결말에 관한 이야기 등등으로 대화를 나누었으나 삼여 년 전부터는 각자 읽은 책에 관한 소감, 이를테면 남편은 자신이 감명 깊게 읽은‘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내용을 요약해 들려주고 주제가 되는 아주 늦게 찾아든 늙은 연인(戀人)의 애틋한 사랑에 대해 내게 물었고 나는 사춘기 시절 읽기는 했으나 당시에는 그 의미도 잘 몰랐고 기억조차 가물가물해 근래에 다시 읽은 ‘폭풍의 언덕’에서의 히스클리프의 순수한 사랑이 어쩌다 그 자신과 연인을 파괴하는 광기(狂氣)로 변질되었을까 하는 것에 관한 남편의 생각을 묻기도 했다. 그런 대화 중 재미있던 것은 소설의 무대가 되는 미국 아이오와(Iowa)주의 메디슨 카운티와 이미 한 차례 다녀온 유럽 여행을 다시 가게 되면 반드시 여행 코스에‘폭풍의 언덕’의 무대가 되는 영국 요크셔 지방의 하워스(Haworth)마을을 넣어 찾아가보자는, 실현 여부와는 관계없이 생각만으로도 자못 즐겁고 설레는 희망을 가지게도 되던 것이다. 특히, 광기어린 눈빛의 한 사내가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절망으로 히스꽃 만발한 바닷가 언덕을 포효하며 정처 없이 쏘다니는 소설 속 광경을 머릿속에 그리며 찾아간 그곳에서 그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짐작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사랑에 관해 좀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책을 사랑한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난 후 그것이 감동이든 지식이든 그로 인해 그만큼 더 내 사유(思惟)의 깊이가 깊어졌으리라는 성취감을 사랑한다. 책을 읽고 느낀 감동으로 나와 타인, 그리고 세상을 보는 내 마음의 눈은 더 진지하고 따듯해 질 것이며 책속의 길을 따라 걷다보면 더 많은 길에 내 발자국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부터 틈틈이 칼 세이건(Carl Sagan)의 ‘Cosmos’를 읽고 있다. 그를 읽는 동안 나는, 내 의식은, 수시로 넓고 넓은 우주와 수억 광년(光年) 떨어진 미지의 행성들을 떠다니고 있을 것이며 우주를 한 권에 담아 그 두께가 만만치 않은 책을 다 읽고 나면 나는 자주 밤하늘의 별들을 올려다 볼 것이고 어쩌면 어느 밤에는 머나먼 외계의 어느 행성에 단숨에 닿아 그곳에서 창백한 푸른 점인 지구를 보고 있기도 할 것이다.
오늘 저녁에도 늘 그렇듯 남편과 나는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며 책 속의 길을 따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걸어갈 것이다. 나의, 가장 소중하고도 행복한 시간이 새삼 기다려진다.
이 현 희 (금상 수상 作)
책갈피가 꽂혀있는 책을 다시 펼친다. 어제까지 읽었던 부분이 되살아나고 이제 그 다음을 읽을 차례다. 두꺼운 한 권을 하루나 이틀 정도 단숨에 읽을 책도 있지만 그런 책일수록 일부러 나는 조금씩 읽는다. 아껴둔 과자를 조금씩 꺼내 먹듯 읽는 것이 좋아서이다. 즐겨 시청하는 드라마의 한 회가 갈등이든 위기든 무척이나 아슬아슬하게 끝나 다음 회가 무척이나 궁금해지고 기다려지는 그런 심리 같은 것일 수도 있고 나의 독서 습관일 수도 있지만 좋은 책일수록 그렇듯 날마다 조금씩 음미하며 읽어야 한다는, 이를테면 양서(良書)를 판별하는 나의 기준 같은 것이기도 하다.
책을 읽는다. 낱낱의 활자들을 읽는 것은 비록 눈이지만 그들이 어울려 하나의 상(像)으로 마음에 또렷하게 맺힌다. 그런 심상(心像)들이 큰 의미나 울림으로 나의 가난한 마음을 더 알차고 풍요롭게 가꾸는 것이라 여기는 것이 내 아는 독서의 가치나 효용인 셈이다. 그리하여 우습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가 책을 읽는 시간은 짧든 길든 심심함을 달래거나 무료한 시간을 때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를 통해 지적 욕구는 물론이고 나 자신과 타인들의 모든 것들을 이해하고 공감함으로써 결국에는 나 자신과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려는 경건한 한 때인 것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그 자신을 그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듯 여기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처럼 의외로 자신이 자신에 대해 무지한 경우가 많다는 것을 독서를 통해 깨닫는다. 그리하여 독서는 고요히 책을 읽어가며 내 내면에서 이는 소리들에 귀 기울임으로써 타인이 아닌 내가 나와 소통하는 소중한 시간이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은 없어진 모 출판사에서 주부를 대상으로 공모한 독후감 공모에 응모하여 비교적 큰 상을 받았던 것을-. 읽는 것은 좋지만 쓰는 것에는 소질이 없어 응모하겠다는 의도가 전혀 없었음에도 한 여자의 삶을 기록한 책의 내용이 그때껏 걸어왔고 앞으로 걸어갈 내 삶의 방향과 어찌 그리도 비슷하게 느껴지던 것인지 그리하여 오직 공감(共感)한다는 그 느낌 하나로 솔직하게 쓴 것이 뜻밖에 감사해야 마땅한 결과를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독서가 공감만을 얻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는 전혀 다른 이질적인 느낌을 받는 것이라도 그것은 그것대로 내가 겪지 못한 또 하나의 삶으로 혹은, 간접 경험으로서의 가치를 가지는 것이니 독서를 통해 얻는 것은 세상의 다양한 삶들과 지식들, 그리고 가치들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하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가끔 파란만장한 누군가의 일생을 다룬 책을 읽고 나면 마치 내가 그런 삶을 산 것 같은 생각이 들어 한참동안 가슴이 먹먹해지기도 하던 것이다.
나의 가장 행복한 시간은 마음을 가지런히 하여 책을 읽는 시간이지만 그 못지않게 행복한 시간은 책을 고르는 시간이다. 동네 서점이나 도심의 큰 책방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이미 포만감이 들고 그곳에 들어 서가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수많은 책들을 이것저것 펼쳐보며 고르는 그 시간이 조금도 지루하거나 아깝지 않고 즐겁기만 하던 것이다. 누군가가 들으면 공연한 지적 허영심이라고 할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많은 책들과 그 안에 담긴 내용들이 그 때만큼은 다 내 것인 것만 같은 생각이 들어서이다. 독서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남편도 그렇고 나도 그렇지만 좋은 책은 빌려보는 것이 아니라 구입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책을 자주 사는 편인데 남편은 주로 인터넷 서점을 이용하는 반면에 나는 직접 서점에 가서 서가에 꽂혀있는 책들을 꺼내 펼쳐 눈으로 보며 고르는 것이 좋다. 언젠가 남편이 농(弄) 삼아 서점에 직접 가는 것이나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것이나 그 책이 그 책 아니냐며 말해 내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서점에 가면 그 많은 책들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기도 하고 책들에서 풍겨나는 제각각의 향기 같은 것이 있다고 답했는데 남편이 그를 믿든, 믿지 않든 그것이 내가 직접 서점에 가는 이유이다. 필요한 것들을 집에서 받을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기는 하지만 같은 빵이라도 주문해서 배달된 빵보다 이른 아침 빵가게에 직접 가서 갓 구워낸 빵에서 풍겨나는 특유의 짙은 효모 냄새를 코로 맡고 모락모락 피어나는 수증기를 눈으로 보면 빵이 더 먹음직스럽게 느껴지는 물론이고 까닭 없이 하루가 더 행복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는 프랑스의 한 여류 작가의 말과도 통하는 답이기도 한 것이다. 조금 더 과장해서 말하면 내게 서점은 종교적인 의미는 아니지만 하나의 성지(聖地) 같은 곳이라 그곳에 가는 것은 일종의 순례(巡禮)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독서가 책을 통해 내 그때껏 모르던 것들을 앎으로써 깨달음을 얻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또한, 책을 교주(敎主)로 하는 하나의 종교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곳에서 고르는 책들에 나만의 특별한 취향이나 관심분야가 있는 것이 아니라서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 편이지만 굳이 그를 묻는다면 내가 경험하지 못한 삶을 다룬 수필이나 소설을 즐겨 선택하는 편인데 그것이 비록 타인의 삶이기는 하지만 이해와 공감을 통해 나의 삶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니 어떻게 걷던 오직 한 길일뿐인 내 삶의 영역이 그만큼 넓어지는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책속에 길이 있다.’는 말의 의미는 넓고도 깊어 한 줄기 외길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길들이 그 안에 있어 사람들은 책을 읽고 깨달으며 저마다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삼여 년 전부터 저녁식사 후 남편과 함께 아파트 인근을 산책하고 돌아와 짧게나마 티타임을 갖고 있다. 그 이전에도 이따금 그런 적은 있었지만 주로 두 딸의 신상 문제와 빠듯한 살림, 그리고 한낱 가십거리에 지나지 않는 TV 드라마의 전개와 결말에 관한 이야기 등등으로 대화를 나누었으나 삼여 년 전부터는 각자 읽은 책에 관한 소감, 이를테면 남편은 자신이 감명 깊게 읽은‘메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내용을 요약해 들려주고 주제가 되는 아주 늦게 찾아든 늙은 연인(戀人)의 애틋한 사랑에 대해 내게 물었고 나는 사춘기 시절 읽기는 했으나 당시에는 그 의미도 잘 몰랐고 기억조차 가물가물해 근래에 다시 읽은 ‘폭풍의 언덕’에서의 히스클리프의 순수한 사랑이 어쩌다 그 자신과 연인을 파괴하는 광기(狂氣)로 변질되었을까 하는 것에 관한 남편의 생각을 묻기도 했다. 그런 대화 중 재미있던 것은 소설의 무대가 되는 미국 아이오와(Iowa)주의 메디슨 카운티와 이미 한 차례 다녀온 유럽 여행을 다시 가게 되면 반드시 여행 코스에‘폭풍의 언덕’의 무대가 되는 영국 요크셔 지방의 하워스(Haworth)마을을 넣어 찾아가보자는, 실현 여부와는 관계없이 생각만으로도 자못 즐겁고 설레는 희망을 가지게도 되던 것이다. 특히, 광기어린 눈빛의 한 사내가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절망으로 히스꽃 만발한 바닷가 언덕을 포효하며 정처 없이 쏘다니는 소설 속 광경을 머릿속에 그리며 찾아간 그곳에서 그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짐작이라도 할 수만 있다면 사랑에 관해 좀 더 많은 말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책을 사랑한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난 후 그것이 감동이든 지식이든 그로 인해 그만큼 더 내 사유(思惟)의 깊이가 깊어졌으리라는 성취감을 사랑한다. 책을 읽고 느낀 감동으로 나와 타인, 그리고 세상을 보는 내 마음의 눈은 더 진지하고 따듯해 질 것이며 책속의 길을 따라 걷다보면 더 많은 길에 내 발자국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부터 틈틈이 칼 세이건(Carl Sagan)의 ‘Cosmos’를 읽고 있다. 그를 읽는 동안 나는, 내 의식은, 수시로 넓고 넓은 우주와 수억 광년(光年) 떨어진 미지의 행성들을 떠다니고 있을 것이며 우주를 한 권에 담아 그 두께가 만만치 않은 책을 다 읽고 나면 나는 자주 밤하늘의 별들을 올려다 볼 것이고 어쩌면 어느 밤에는 머나먼 외계의 어느 행성에 단숨에 닿아 그곳에서 창백한 푸른 점인 지구를 보고 있기도 할 것이다.
오늘 저녁에도 늘 그렇듯 남편과 나는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며 책 속의 길을 따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걸어갈 것이다. 나의, 가장 소중하고도 행복한 시간이 새삼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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