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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은상] 윤승선 - 유 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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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2-08-23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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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혹
 
윤 승 선 (은상 수상 作)

‘책은 또 다른 책을 유혹한다.’ 도서관 입구 현수막에 쓰여 나부끼던 말이다. 오, 멋진 유혹! 정말 책은 또 다른 책을 유혹한다. 이런 유혹이라면 얼마든지 넘어가도 좋으리. 보수동 꼭대기에 있는 중앙도서관으로 오늘도 나는 유혹 당하러 간다.

서구청 앞에서 탄 마을버스는 구불구불, 스릴과 서스펜스가 넘치는 길을 달려 더도 말도 덜도 말고 중앙 도서관 딱 정문 앞에 선다. 버스에서 발을 내리는 순간, 나는 여왕이 된다. 설렘과 기쁨을 신하로 거느린 우아하고 품격 있는 여왕은 수많은 책 군사들이 사열을 기다리는 열람실로 들어선다. 여왕의 눈에 들어 간택되기를 바라는 책 군사들을 날카롭지만 너그럽게 살피고 다닌다. 음, 훌륭하고 멋진 군사들이 많군. 천군만마를 얻은 듯 내 마음은 충만해진다.

이 책 저 책 읽을 욕심으로 행복한 고민을 하던 나는 급기야 망상에 빠진다. 볼모로 잡혀와 하필이면 도서관에 갇힌, 나는 이웃 나라의 공주. 날 구하러 올 때까지 유유히 책을 읽으며 지낸다. 한국 소설을 섭렵한다. 나를 구하러 올 기척이 없다. 날 구하러 오지 않아도 나는 초조해 하지 않으리. 한국 비소설들을 읽고 외국 소설들을 읽고 외국 비소설들을 읽고. 그래도 구하러 오지 않는다면 3층 열람실로 옮겨달라고 한번쯤 애원해볼까? 그러나 결코 불안에, 공포에 내 맘을 뺏기지는 않으리. 그렇게 책 속에 묻혀 늙어가도 좋으리. 나는 여전히 기품 있는 이웃나라의 공주. 품위를 지키며 늙어 가리라, 책 속에서. 난생처음 맞이한 이 자유로운 축복을 평화롭게 즐기리.
상상 속에서 나는 마냥 행복하다.

남편은 이런 날더러 현실 부적응 주의자라고 한다. 현실을 모르고 소설 속에서 산다고. 소설 속 주인공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빈정거린다.
뭔 소리! 살다보니 소설보다 더 소설적인 게 현실이더라.

우리 가족에게 경제적 위기가 찾았던 한 때 나는 더 책 속으로 숨어들었다. 한 친구는 도서관 끊어라, 책 끊어라, 돈 되는 일을 하라, 고 충고했다. 그러려고 해봤다.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돈 되는 일은 나에게는 돈도 안 되면서 나를 더 무기력하게 했고 나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경제적인 가난보다 정신의 가난을 먼저 해결해야 했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할아버지’는 나에게 말해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괜히 고민해봤자 도움이 안 돼. 어차피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세상은 살아가게 돼있다” 고. 나는 소설 속 세상으로 들어가 주인공이 되어본다. ‘영혼의 편지’를 읽으며 가난과 불안과 고독 속에서 그림에 열정을 쏟아 붓는 고호가 되어도 보고. 남편과의 불화와 힘든 시집살이를 재능으로 빛내는 ‘난설헌’이 되어보기도 하고.
그렇게 나는 알게 되었다. 이 고통과 슬픔을 품위 있게 견디려면 행복에도 불행에도 충실해야 하는 걸. 비상은 고통 끝에 겨우겨우 온다는 걸. 슬픔과 고통이 꿈의 궁전도 짓게 한다는 걸. 그래서 고난이 언제나 비극은 아니라는 걸.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내 처지를 잊게 되고 내 고난은 너무나 하찮게 여기게 되었다. 내 엄살이 부끄러워졌다. 이렇게 책은 슬픔이 번지는 걸 막아 주고, 지옥이 세력을 넓히는 걸 막아주었다.

‘덕혜옹주’가 되어 냉대와 감시 속에 치욕을 견디며 살아본다. 17살에 엄마가 되어 희귀병을 앓는 자식을 키워보고, 부모보다 빨리 늙어버리는 병을 가지고도 ‘두근두근 내 인생’을 살아보기도 한다. ‘감옥에 가기로 한 메르타 할머니’와 함께 노인을 홀대하는 사회에 흥분하며, 체념하지 않고 씩씩하게 사고치고 다니는 할머니가 되어본다. 성격 까칠한 ‘오베’가 되어 까칠함 뒤에 있는 따뜻함으로 이웃들을 보담아 주기도 한다.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 달랬어요’의 할머니처럼 미래의 내 손녀손자에게 슈퍼히어로 할머니가 되겠다고 다짐도 한다.
지독한 사랑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한다. 사랑을 잃고 비틀거리는 비련의 여인이 되기도 한다. 어느새 나는 소설 속 주인공이 되어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더 섬세하고 따뜻하게 세상을 바라보게 된다. 예전엔 당연했던 일들이 이제는 고맙다.

학자도 정치가도 사상가도 아닌 아버지인, 지아비인, 동생인 정약용이 되어 편지를 쓰고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나는 아들딸이 되어, 아내가 되어, 형이 되어 읽는다. ‘책만 보는 바보’가 되겠다는 야무진 꿈도 꾼다. 마음만 있고 정작 행동은 하지 않는 내게, 하찮은 행위라도 자연스럽게 몸에 밸 때까지 반복하여 자유를 만끽하라, 는 장자의 귀띔을 깊이 새긴다. 하늘과 땅과 우주를 가르는 아득한 ‘열하’의 호곡장이 아니어도 내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사랑과 미움, 욕심을 다 토해 낼 나만의 호곡장을 찾아도 본다.
책을 읽으며 나는 세기를 넘나들고, 공간을 넘나들며 산다. 남자로도 여자로도 노인으로도 젊은이로도 어린아이로도 살아본다. 사람들의 상처는 내 상처가 되고, 옛 스승들의 철학은 내 철학이 된다.
어쩌면 앞으로 내게 닥쳐올지도 모를 일을 미리 겪어보기도 하고, 내가 전혀 상상도 못할 다른 세상을 구경하기도 한다.
이보다 더 매력적인 일이 있을까?

책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 야물게 만든다. 아니 책은 나를 말랑말랑하게 만든다. 부드럽게 만든다. 나는 앞으로 더 누구일수 있을까?
도서관 다녀온 날, 아무 것도 가진 것 없던 나는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하다. 책은 내게 아무 것도 가지지 말고 모든 걸 다 가지라고 유혹한다.